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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국 출신 탈북민의 어려움 돕고 싶어 - 통일안보북한학과 이성월 학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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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24.10.18 | 조회수 | 1484 |
제3국 출신 탈북민의 어려움 돕고 싶어
통일안보북한학과 이성월 학우
[사진] 통일안보북한학과 이성월 학우
교육부에서 발표한 탈북학생 통계 현황을 보면 제3국 출생자녀 비중은 2013년 41.5%에서 2023년 4월에는 71.1%로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러한 증가 속도에 반해 이들의 온전한 정착에 필요한 지원책은 아직 부족한 실정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안고 꿋꿋하게 성장해 가는 탈북민 2세가 있다.
출생의 비밀
이성월씨(23세)는 제3국에서 출생한 탈북민 자녀다. 일곱 살에 엄마를 찾아 대한민국에 온 그가 이제는 20대의 어엿한 성인이 되었다. 탈북민 엄마와 중국 조선족 아빠라는 남다른 가정환경은 그를 너무 일찍 철들게 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이미 엄마가 다른 친구들의 엄마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엄마는 그가 태어나기 전과 태어나 젖먹이 시절, 두 차례에 걸쳐 북송을 당한 아픈 사연을 가지고 있었다. 늘 북송될까 두려움에 도망다니고, 공안차(경찰차)가 경광등을 번쩍이며 집 마당에 들이닥칠 때마다 숨기 바쁜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
어느 날, 엄마는 어린 성월을 앉혀놓고 자신이 멀리 떠나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어린 마음에 엄마의 옷자락을 꼭 붙잡고 가면 안 된다고 울면서 발버둥질했다.
“엄마가 너랑 늘 함께 살자면 지금은 가야돼. 엄마가 가르쳐준 노래를 부르며 기다리면 꼭 데리러 올게." 라는 말을 남긴 채 집을 떠났다.
어린 네살, 그것도 집이 없어 큰아버지 집에 얹혀살던 그에게 그나마 의지가 되었던 아빠마저 그가 다섯 살이 되던 해, 엄마를 따라 한국으로 떠났다. 그때는 엄마가 어리갔는지, 왜 갔는지 몰랐지만, 엄마가 자신을 버리고 떠나야할 이유가 있었음을 어린 가슴에 묵묵히 받아들였다. 성월 씨는 큰아버지의 가족들과 함께 살면서 학대도 받고, 무시를 당하면서도 엄마가 가르쳐준 노래를 부르며 엄마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드디어 성월 씨에게 엄마를 찾아 한국으로 가는날이 찾아왔다. 엄마 아빠랑 함께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에 마음은 하늘을 날았고,
이제는 꽃길만 걸을거라 부푼 꿈을 안고 일곱 살 되던 해 겨울 인천공항에 첫발을 내디뎠다. 사랑하는 엄마 아빠와 삶의 보금자리가 펼쳐진 곳은 충청북도 충주였다.
꿈과 현실 사이
하지만 그가 상상했던 동화같은 행복한 꿈은 차가운 현실 앞에 얼음으로 변했다. 그의 코리안드림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악몽이 되어 버렸다. 그 당시만해도 충주에는 대안학교가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런 학교가
있는지조차 몰랐다. 그래서 일반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조선족 특유의 높은 톤의 말투와 서툰 한국어로 그는 아이들의 놀림 대상이 되었다. 아이들의 따돌림과 무시를 속수무책으로 당해야만 했던 어린 소녀는 갈수록 소심해지고, 우울해져갔다. 초등학교 4학년 되던 해에는 담임선생님이 작성한 학생 카드에 기록된 '새터민 자녀'라는 표기를 반 아이들 전체가 보게 되는 사건이 발생했고, 그 후 아이들의 괴롭힘은 더 심해졌다. 10대의 어린 소녀에게 감당할 수 없는 무게가 되어 어깨를 짓눌렀고, 마음 속 상처로 하여 건강도 많이 안좋아지는 상황에 이르렀다.
1년 365일 중 그가 학교 가는 날은 한 달 정도 밖에 안 되었고, 하루가 멀다하고 병원을 들락거려야만 했다. 그런 상태는 그를 더욱더 외톨이로 만들어버렸고, 마음은 점점 위축되어 남의 눈치를 보면서 사는 아이가 되어버렸다. 자신감은 바닥을 쳤고 당당하지 못하다보니 늘 위축돼 스스로를 괴롭혔다. 초등학교 6년과 중학교 3년은 그에게 악몽과도 같은 시기였고,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 민들레 홀씨처럼 부유하는 나날이었다. 삶을 포기하려고 마음먹은 적도 있다. 하지만 그때마다 자신을 위해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시는 부모님에게 미안해 마음을 가다듬기를 반복했다. 부모님이 자신이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는걸 알면 가슴 아파할까 전혀 내색하지 않고 집에서는 밝은딸로, 학교에서는 왕따를 당하는 이중생활을 9년이나 했다.
마음의 사막에 찾아온 오아시스
그래도 세월은 흘러 어느덧 고등학생이 된 성월 씨, 차츰 자신의 특별한 정체성에 적응되었고, 그렇게 그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면서 자신도 모르게 성숙한 소녀로 성장해 가고 있었다. 홀로 남겨진 것 같은 세상에서 자신이 살아남는 길을 스스로 터득한 그는 마음속의 아픈 상처로 생긴 허물을 밝고 천진한 성격과 미소로 덮고 남들 앞에 나서는 방법을 택했다.
그래서인지 그에게도 친구가 찾아왔다. 말라버린 마음의 사막에 오아시스처럼 찾아온 친구가 더없이
소중할수록 자신이 탈북민 자녀라는 걸 알면 훌쩍 떠나가 버릴 것 같은 불안감도 없지 않았다.
어느 날 그는 큰마음을 먹고 친구에게 자신의 출신을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하지만 고마운 친구는 그의 고백에도 그를 탓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처럼 그를 대했다. 오히려 친구의 엄마까지 성월 씨의 가정사를 자녀에게서 듣고 참 잘왔다고,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고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 힘들게 온 만큼 잘 살아야 한다면서 고생하신 부모님 잘 모시고 열심히 살아야한다고 응원해 주었다. 모두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던 그에게 살아가야할 이유를 찾게 해준 고마운 은인이었다. 조금씩 철들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는 당당해지는 지혜를 터득했고, 수많은 외로움과 무시를 이겨내고 세상을 향해 굳게 닫았던 마음의 문을 열고 나섰다.
홀로 외로움과 싸웠던 성월 씨는 지금은 어엿한 대학생이 되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용기를 내서 나온세상은 그에게 많은 희망과 꿈을 갖게 해주었다. 그 가운데 유독 엄마랑 공통으로 가진 꿈이 있었다. 바로 엄마의 고향인 북한으로 가보는 것이다. 성월씨 엄마는 그 꿈을 이루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고 늘 이야기했다. 그래서 그는 엄마의 소원이자 자신의 꿈인 북한에 갈 그날을 위해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2년제 대학에서 요리를 배운 성월 씨는 북한에 대해 배우는 길을 택했다. 찾아보니 서울사이버대학교에 통일안보북한학과가 있었다. 마침 경제활동을 하면서도 공부를 할 수 있어 지원서를 넣었다. 하지만 제3국출생이다 보니 사이버대학 편입도 쉽지만은 않았다. 천신만고 끝에 대학에 편입했고, 지금은 일하면서 배우는 대학생이 되었다.
편입한지 얼마 안 되다 보니 많은 것이 이해하기 어렵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다면서 가능하면 대학원까지 공부하는 것이 목표라며 밝게 웃는 성월 씨, 제3국 출생자녀들이 자신과 같은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돕기 위해 다문화 관련 공부도하고 있다. 얼마 전 국민통일방송에 출연하고 유튜브에서도 자신이 살아온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이성월씨.
제3국 출신 자녀들에게 자신처럼 외로움 속에서 어렵고 힘든 생활을 하면서도 견디고 추스르다보면좋은 날이 온다는 희망을 주고 동기부여를 제공하는 길잡이가 되고 싶다고 한다. 또한 용기는 나는 것이 아닌 내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싶단다.
동포사랑 vol. 110 2024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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