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칼럼
| 인간 없는 미술사는 가능한가 - 회화과 정규리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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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일 | 2026.05.04 | 조회수 | 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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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과 정규리 교수
최근 현대미술은 서로 반대되는 듯한 두 흐름을
동시에 보여준다. 한편에서는 AI, 게임 엔진, 가상현실을 활용한 작업이 제도권 전시의 중심으로 진입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회화적 제작 방식과 물질의 감각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기술은 더 빠르게 진보하는데, 예술은 오히려 표면과 재료, 신체의 흔적을 호출한다. 이 역설은 단순한 트렌드가 아니다. 그것은 오늘의 예술이 어디에서
흔들리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징후다.
이 흔들림의 핵심에는 하나의 혼동이 있다. 사람들은 이미지의 생산과 예술의 성립을 같은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지를 산출하는 일과 예술을 성립시키는 일은 전혀 다르다. 이미지는 데이터와 연산만으로도 만들어질 수 있지만, 예술은 역사적으로
언제나 단순한 산출물 이상의 것이었다. 뒤샹 이후 미술의 핵심에는 선택과 지목의 문제가 강하게 전면화됐다. 무엇을 남길 것인가, 무엇을 작품으로 승인할 것인가, 어떤 형식이 한 시대의 감각과 사유를 대표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을
둘러싼 판단과 해석, 선택과 책임이 있어야 비로소 미술은 성립한다. 근대
이후의 미술사는 이러한 미학적 판단이 축적돼 온 역사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노동 자체보다 인간의 판단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구체적 상황 속에서 무엇이 적절하고 가치 있는지를 식별하는 실천적 판단, 곧
프로네시스의 문제다. AI 시대의 미술가는 더 이상 단순히 잘 만드는 사람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오히려 무엇이 작품이 될 수 있는지를 식별하고, 어떤 결과물에 의미와
형식을 부여하며, 그 결과에 책임지는 존재로 다시 정의된다. 나는
이를 ‘호모 아르비터(Homo Arbiter)’, 곧 판단하고
조정하는 인간이라 부르고 싶다. 실제로 오늘날 일부 작가들은 AI가
생성한 수백 장의 이미지 가운데 단 하나를 선택하거나, 그것을 특정한 전시 맥락 속에서 재편집하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이때 작가는 단순한 제작자가 아니라 편집자이자 해석자이며,
동시에 승인과 책임의 주체가 된다.
AI는 이러한 저자성의 문제를 한 단계 더 밀어붙인다. 이제 창작은 더 이상 한 사람의
손안에 머물지 않는다. 프롬프트를 작성하는 사람, 모델을
설계하는 엔지니어, 데이터를 제공한 선행 이미지들, 그것을
유통하는 플랫폼이 동시에 개입한다. 문제는 AI 기술이 이미지를
인간보다 잘 만든다는 데 있지 않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그 이미지의 의미와 가치가 어디에서, 어떤 기준에 의해 결정되는지가 점점 보이지 않게 된다는 데 있다. 오늘날의
위기는 재현의 위기를 넘어 판단의 위기로 이동하고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역설적으로 회화의 물질성은 다시 중요해진다. 디지털 이미지는 무한히 복제되고
즉시 유통되지만, 회화는 특정한 표면과 재료, 몸의 움직임,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축적을 전제로 한다. 물감의 질감, 표면의 저항, 손의 흔적은 단지 복고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예술이 여전히 시간을 통과한 판단의 형식임을 보여주는 증거다. AI가
매끄럽고 완결된 이미지를 대량으로 제공할수록, 인간은 그 안에 없는 것?현존과 비가역성, 신체적 저항?을 더 예민하게 감지하게 된다.
따라서 질문은 단순히 AI가 예술을 대체하는가 아닌가에 있지 않다. 더 근본적인 물음은 이것이다. 예술은 무엇으로 성립하는가. 만약 예술이 결과물의 새로움만으로 성립한다면, 인간은 머지않아 주변화될
수 있다. 그러나 예술이 한 시대의 감각을 해석하고 형식에 의미를 부여하며 그 선택에 책임지는 행위라면, 인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더 이상 제작의 유일한 주인이 아니라
판단의 주체로 다시 정의될 뿐이다.
인간 없는 미술사는 가능한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미술사는 작가의 노동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판단과 해석, 승인과 책임으로 이뤄져 왔기 때문이다. AI는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이 오래 기억될 가치가 있는 예술인지를 숙고하고 결정하는 일은, 여전히 인간의 몫으로 남아 있다.
투데이신문 2026.04.17. 회화과 정규리 교수 https://www.n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6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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